배경
청나라 초기까지 명나라에는 왕조의 부흥을 꿈꾸던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반군이 되어 청나라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출신의 한족 문인들은 스스로를 여전히 명의 신하라고 믿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었고, 그림을 그려 청나라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드러냈는데요.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느낌의 산수화를 그려 나라 잃은 슬픔을 한탄하거나, 거꾸로 심긴 나무와 허공에 떠 있는 벼랑 등을 그려 혼란스러운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오늘 만나볼 4대 승려화가 - 팔대산인, 석도, 홍인, 곤잔은 위와 같은 배경 속에서 종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화가들입니다.
4대 승려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
팔대산인의 본명은 주답(朱耷)*으로 중국 회화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입니다.(*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의 본명 주원장(朱元璋)이며 주답은 왕실의 후손입니다.) 익양왕의 후손으로 강서 남창(南昌, 오늘날 중국 동남부 장시성의 정치·경제 중심지)에서 태어난 그는 왕실 저택에서 아주 풍족하고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살이 되던 해, 명나라가 멸망하고 평화롭던 그의 삶도 뿌리째 흔들립니다. 원래 쾌활한 성격이었던 그는 이때부터 10년 넘게 말을 하지 않았고, 끝내 속세를 등졌습니다. 그러고는 20여 년 동안 산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며 살았는데요. 결국 시간이 약이었을까요? 나이가 들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그림과 글씨를 통해 독창적인 화조화와 산수화를 선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의 화조화는 구도가 간결하고 개체의 형태가 명확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새나 물고기는 마치 요즘 만화에 나올 법한 생생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불만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동물의 얼굴은 황량한 분위기의 연꽃이나 풀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어쩌면 팔대산인은 명 왕조가 사라진 황폐한 세상에 홀로 남은 자기 모습을 동물에 빗대어 표현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답은 승려가 된 후 여러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쓴 이름이 60이 다 되어 사용하기 시작한 법호, 팔대산인입니다. 이 네 글자를 세로로 쓰면 '곡지(哭之)' 또는 '소지(笑之)'처럼 보이는데요. 평생토록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던 본인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언어유희를 통해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어요.
「하상화도(河上花圖)」는 팔대산인의 대표작으로 거리낌 없는 강렬한 붓놀림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연꽃 그림에 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걸작이지요. 색을 쓰지 않았는데도 화려한 느낌이 드는 것은 먹의 다양한 농담과 갈필과 윤필의 능숙한 운용 때문입니다. 작품 속 발문에 따르면 이 그림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장장 4개월에 걸쳐 그렸다고 하지만, 붓놀림을 보면 일필휘지로 그린 것처럼 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구상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4개월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홍인(弘仁: 1610~1664)
명나라가 멸망한 뒤,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된 홍인은 제운산에 터를 잡고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주 황산과 안탕산을 여행하고, 그곳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홍인의 그림은 원나라 화가, 예찬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고세련된 필법을 보여줍니다. 나무와 바위, 숲과 산을눈으로 보듯이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지요.
홍인은 옛 대가들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주제의 산수화를 남겼습니다. 특히 황산의 이상하고도 기묘한 모습은 홍인에게 큰 영감을 주었는데요. 아래는 홍인의 대표작 「송학청천도(松鶴淸泉圖)」입니다.
절벽 위 소나무들은 벼랑 틈새로 뿌리를 내리고, 호수는 물결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맑고 고요합니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만이 그 정적을 깨트릴 뿐입니다. 계곡 너머에는 암자로 추측되는 작은 집 한 채와 대나무 숲이 있지만,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작가는 깔끔하고 미려한 필법으로 오직 아름다운 산과 물로 완벽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평화로운 그의 작품은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곤잔 (髡殘: 1612~1673)
곤잔은 무릉, 오늘날 호남 상덕 출신으로 남경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그는 저명한 문인이었던 전겸익, 고염무, 공현, 주양공 등과 어울리면서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청 군대가 남쪽으로 진격할 무렵 곤잔은 저항군에 입대하지만, 오래지 않아 저항 세력은 섬멸되고 맙니다. 그는 산속에 몸을 숨기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각 지방의 암자를 떠돌아다니면서도 그림과 시를 항상 가까이했습니다.
맑고 담백한 산수화를 그린 홍인과 달리, 곤잔은 자유로우면서 힘찬 화풍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과거 대가들의 기법을 두루 수용하면서도 특정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법을 섭렵했습니다. 특히 곤잔이 먹을 쓰는 방식은 송나라 화가 미불의 영향을 받았는데, 곤잔의 대표작「선원도(仙源圖)」에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납니다.
석도( 石濤: 1642~1718)
석도(본명 주약극)는 팔대산인처럼 명 왕조의 후손이지만,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생을 끝까지 고통스럽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정강왕 주수겸의 아들로 아버지는 명나라 말 정권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646년 사망하고, 5살이던 석도는 환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그 후로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1662년 선종의 승려가 된 석도는 여산과 황산 같은 명산에 오르기도 하고, 선성과 강녕(오늘날 안휘성과 남경)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왕조의 권력 기반이 확고해질수록 이민족에 대한 강렬했던 민족주의 감정은 차차 수그러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가 양주에 왔을 때는 지역 명사 신분으로 참석하여 기념 시를 짓기도 했으니까요.
「회양결추도(淮揚潔秋圖)」는 석도가 양주에 정착한 뒤에 그린 작품입니다. 강소 북부 회양의 평원 또는 양주 북쪽의 외곽 지역을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갈대와 나무가 무성한 강변과 듬성듬성한 나무들 사이로 빽빽하게 집이 들어차 있습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성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 위에는 배 한 척이 떠 있고, 배 위에는 어부 하나가 한가롭게 앉아 있습니다. 마치 크로키를 한 것처럼 화면에는 생동감이 가득합니다. 그림 위의 긴 제발은 양주가 변화해 온 모습을 적은 것입니다.
석도는 산수, 대나무, 바위그림에 뛰어났으며 붓과 먹을 사용하는 데 있어 기존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하게 옛 양식을 답습하지 말고, 화가의 눈으로 자연을 보고 가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이해하고, 같음과 같지 않음의 사이(不似之似似之)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지요.
석도는 먹의 농담을 놀라울 만큼 다양하게 관찰하고, 그 기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는데요. 자기 작품에 '먹의 어두움 안에는 거대한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을 써놓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서 <고과화상화어록> 과 작품 속 글과 시를 통해 석도의 독특하고 예리한 회화 이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화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석도는 시, 서, 화, 인장을 결합하는 데 탁월했으며 양주 화단에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청나라 초기 보수적이고 무미건조한 회화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이고, 청나라 중기 '양주팔괴'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